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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찾기, Eugène Delacroix, 외젠 들라크루아, The Death of Sardanapalus,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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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찾기, Eugène Delacroix, 외젠 들라크루아, The Death of Sardanapalus,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The Death of Sardanapalus

#La Mort de Sardanapale

The Death of Sardanapalus (La Mort de Sardanapale) is an oil painting on canvas by the French artist Eugène Delacroix, dated 1827. It is now in the Musée du LouvreParis.[1] A smaller replica, painted by Delacroix in 1844, is now in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2]

The Death of Sardanapalus is based on the tale of Sardanapalus, a king of Assyria, from the historical library of Diodorus Siculus, the ancient Greek historian, and is a work of the era of Romanticism. This painting uses rich, vivid and warm colours, and broad brushstrokes. It was inspired by Lord Byron's play Sardanapalus (1821), and in turn inspired a cantata by Hector BerliozSardanapale (1830), and also Franz Liszt's operaSardanapalo (1845–1852, unfinished).

 

The main focus of Death of Sardanapalus is a large bed draped in rich red fabric. On it lies a man with a disinterested eye overseeing a scene of chaos. He is dressed in flowing white fabrics and sumptuous gold around his neck and head. A woman lies dead at his feet, prone across the lower half of the large bed. She is one of six in the scene, all in various shades of undress, and all in assorted throes of death by the hands of the half dozen men in the scene. There are several people being stabbed with knives and one man is dying from a self-inflicted wound from a sword, and a man in the left foreground is attempting to kill an intricately adorned horse. A young man by the king's right elbow is standing behind a side table which has an elaborate golden decanter and a cup. There are golden elephant heads at the base of the bed, as well as various valuable trinkets scattered amongst the carnage. In the background, several architectural elements are visible but difficult to discern.

Delacroix used a painterly brushstroke in this painting, which allows for a strong sense of movement in the work. This scene is chaotic and violent, as showcased by the movement, weapons, and the colors used. The redness of the bed stands out against the somewhat obscured, dark background. The whiteness of Sardanapalus's robe, the creamy lines of the dying women's limbs, and the shimmers of gold objects throughout the scene pull the viewer's eye quickly around the painting.

There is asymmetry in the work, but the composition remains balanced. One woman reclined by an elephant head on the end of the bed is the only figure to engage with the viewer. Everyone else in the painting is focused on the task at hand: death.

 

Delacroix's Death of Sardanapalus was controversial and polarizing at its exhibition at the Paris Salon of 1828. Delacroix's main figural subject was Sardanapalus, a king willing to destroy all of his possessions, including people and luxurious goods, in a funerary pyre of gore and excess.[3] Sardanapalus was not a classical hero, like the Horatii in Jacques-Louis David’s eponymous painting. Delacroix's Sardanapalus was the antithesis of neoclassical traditions, which favored subdued colors, rigid space, and an overall moral subject matter. He also used foreshortening to tilt the death scene directly into the space of the audience, a far cry from the subdued order of traditional academic paintings. Dorothy Bussy quotes one critic of the work as calling the painting "the fanaticism of ugliness" when it appeared in the Salon in 1828.[4]

Art historian Linda Nochlin has argued that this painting scandalized the Salon because it was understood by contemporaries as a destructive sexual fantasy of Delacroix's own--a collapse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e "Other" of Orientalism (i.e., Sardanapalus) and western man.[5]

The composer Franz Liszt was inspired by Delacroix's painting (and Byron's play) to compose an Italian opera--Sardanapalo--on the topic, telling Princess Cristina Belgiojoso that, in view of the king's self-immolation, his finale will aim to 'set the entire audience alight'.[6] He completed Act 1 only in 1852 and abandoned the project thereafter. The completed first act received its premiere in 2018.[7][8]

 


외젠 들라크루아(프랑스어Eugène Delacroix1798년 4월 26일 ~ 1863년 8월 13일)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이다.[1]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힌다.-위키백과

 

작품의 소재는 종교·신화·문학·역사에서부터 현실의 풍속·인물·풍경·정물 등 다양하다. 벽화·장식을 포함한 유화 외에 데생·수채화·파스텔 화·판화 등 방대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예술에 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일기·평론·편지 등에 많이 기록하여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구사하여 현실을 초월한 진실 속에 상상 세계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영웅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표상이 담겨 있다.[2]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붓놀림과 색의 광학적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이국적 취미에 대한 열정은 상징주의 운동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훌륭한 석판 인쇄공으로써 들라크루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스코틀랜드 작가인 월터 스콧, 독일 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의 많은 작품들을 묘사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이 있다.

그의 주요한 라이벌인 도미니크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적 완벽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예술과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화가들에게서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다는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은 그의 성숙기의 주된 테마의 특징이 되었고, 그리스나 로마 예술을 고전적으로 모방하기보다 이국성을 찾아 북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3] 테오도르 제리코의 친구이면서 정신적인 상속자로서 들라크루아는 자주 난폭함을 보여주는 "장엄의 힘"에 대한 강한 동일시를 공유했던 바이런에게서도 영감을 얻었다.[4]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감상성이나 과장에 젖어 들지 않았고, 그의 낭만주의는 개인주의자의 그것이었다.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있었으나,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하게 결연했다."[5]

대표 작품으로 <히오스섬의 학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단테의 배> 등이 있다.

 

 


1798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랑통 생 모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프랑수아 들라크루아는 혁명정부에서 나름 명성이 있는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궁정 가구업자의 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들라크루아를 임신할 무렵에, 아버지 찰스는 성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다가, 네덜란드에 파견을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외젠이 찰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가 외교관이자 들라크루아 집안과 친하게 지냈던 탈레랑의 아들일 것이라 의심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음악과 연극, 고전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버지 외젠이 7살 때 사망하자 탈레랑이 그의 후견이 되었고, 8살 때 리세 앵페리알에 입학했다. 1814년 어머니가 사망하여 누나 집에서 살다, 1815년에는 숙부의 소개로 유명한 화가인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파리 보자르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루브르 미술관에 드나들면서 루벤스와 제리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819년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1791년 ~ 1824년)의 작품《메두사호의 뗏목》을 보고서 결정적으로 낭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4] 이어 1822년에는 처음으로 낭만주의 그림인《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단테의《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떠올리게 하는 비애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공감하여《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에게 대량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으로 1824년에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1827년《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발표했고, 이어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에 동참했으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프랑스 정부 사절단에 끼어 모로코를 방문했는데, 그 방문 후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를 효과적으로 쓰는 법과 붉은색과 녹색, 푸른색, 오랜지색을 적절히 배합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귀국 후 1834년에 완성한 《알제의 연인들》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레데리크 쇼팽 조르주 상드와도 친분이 있어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상드의 아들인 모리스 디드방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5년부터 1861년까지 들라크루아는 많은 수의 대형 벽화를 제작했으며, 작품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1863년 세상을 떠났다.-나무위키

 

 


#Romanticism

#浪漫主義

#낭만주의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루는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자유로운 공상 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위에서 쓴 바와 같이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한편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상이기도 하다. 고전역학이 성공하고 과학이 성장하면서 자연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지식이 쌓이자 몇몇 사상가 시인들이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들의 주장이 호응을 얻으면서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났다. 이들은 인간을 중시하고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연을 분석하지 말고 상상력으로 통찰하라고 주장한다.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난 곳은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과 대륙 철학의 고장이었던 독일이었다. 이 중 영국의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이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죽은 자연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인식을 통한 재창조로, 영국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죽은 자연을 살아있는 자연으로 바꾸고자 하였다.[2] 맥간[3]은 이러한 인식의 재창조를 하나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당시에 2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오히려 다양한 과학 지식을 섭렵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상, 예술을 형성하게 된다.[4]

18세기까지 유럽의 주류 예술이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은 왕족 귀족 취향에 맞게 장엄하고 화려한 표현을 추구하였다. 반면에 18세기부터 흔히 부르주아라고 일컫는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들(제 3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예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제 3계급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예술사조가 주류로 떠올랐는데, 이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과 학문의 경향을 일컬어 낭만주의라고 한다.

낭만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시골의 평화로운 전원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19세기의 유럽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는데, 제 3계급 시민들이 난잡하고 혼란스럽게 공업화가 되어 가는 도시와 반대되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환경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시 유럽의 시골 농부들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의 실제 삶은 척박하고 억압적인 것이었기에, 낭만주의에 담긴 것은 귀족의 아름다운 시골 정원이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영웅과 같이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낭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전통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보다는 즉흥적, 감정적, 공상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 왕정이 복고되면서, 유럽의 정치는 혁명의 열정을 억누르는 동시에 질서정연한 구체제인 빈 체제로 회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 염증을 느끼던 시민 사회의 정열은 문화로 표출되어 감정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또한 19세기 유럽에서 부유한 시민들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뛰어난 지성인들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대다수는 현대 초등학교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는 수준의 교양에 머물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딱딱하고 머리 아픈 것보다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더 유행하기 쉬운 측면도 있었다.

역사학에서는 소비자 층의 변화에 주목하는 반면에, 음악사 미술사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 스스로의 주도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창작자 자신의 세계가 없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챙기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에 대한 반발로 개개인의 공상 세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생기며, 이때부터 창작자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나무위키

 

미술에서 계몽주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조를 탄생시켰다. 하나는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신고전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라고 하였을 때 '낭만'이라는 단어는 중세 유럽의 통속소설을 의미하는 로망(roman)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 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 사조의 유행은 기본적으로 중세, 더 정확히는 유럽의 고딕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비록 낭만주의에 속한 미술가들이 전적으로 중세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중세 통속 소설에서 보여주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낭만주의가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2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다. 하지만 낭만의 기원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본적인 생각 자체는 이미 이전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용어 그 자체만을 따져보면 이미 1798년의 문화, 예술 관련 문건에서도 낭만주의란 용어가 보인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낭만주의 이전의 경향들을 묶어 전낭만주의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두 사조가 동일하게 자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두 사조는 같은 자연을 두고서도 그를 이해하는 방식이 상이하였다. 낭만주의의 경우 자연을 억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행동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는 요소들인 종교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의 측면에서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규범적인 표현 형식을 탈피하고 주제도 고전주의적 규범에 의거한 역사, 신화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화가들에게 부각된 것은 광기가 휘몰아치는 광경, 이국적인 전설과 자연의 풍경과 같은 것들이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본적인 생각 속에서 예술가 본인의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조들보다 중요하다. 결국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예술가 개인이고 따라서 개인의 표현이 예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만큼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사조는 없었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백록적인 성격을 띤 자서전이나 자화상 등을 자주 그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몇몇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시기 자주 그려졌던 풍경화를 자화상의 일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터너의 경우 자신의 대표작 <눈보라- 항구 어귀에서 표류하는 증기선>을 그린 후 "난 단지 이런 장면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중략)...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 그림을 좋아할 의무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굳이 남들에게 이해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프리드리히도 인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통해서 개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비단 낭만주의 사조 속에 들어간 생각 뿐만이 아니라 낭만주의 미술가 개개의 삶도 여타 다른 사조와는 두드러지게 미술 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점이 많다. '광인'이라 불렸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윌리엄 터너는 말년에 은둔 생활로 시종일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삶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는 검은 방에서 독수공방하였던 프란시스코 고야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미술 사조와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유럽 세계의 변화와 빈체제로 대표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혁명의 실패에 따른 개인의 충격이 '낭만주의적인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비단 한 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는 18세기 ~ 19세기 초의 미술 경향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풍경화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미술사를 바라보면 낭만주의는 풍경화를 역사화와 동등한 지위로까지 올려놓은 사조라고 볼 수 있다. 미술사의 큰 역사에서 르네상스 이후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역사화가 이제 풍경화의 부각으로 인해 독점적인 우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후 역사화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카데미 미술 체제에서 역사화는 중요한 장르였고 평가도 다른 여타 장르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만약 낭만주의자들이 풍경화의 지위를 상승시켜 놓지 않았다면 이후의 ism시대로 상징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조들이 풍경화를 통해서 자신의 사조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발 더 나아가 장르간의 위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위계 자체가 18세기의 구체제를 답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풍경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고 그러한 가치는 '영웅적인 풍경화',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 두 용어는 풍경화와 낭만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배경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용어 중 하나다. 영웅적인 풍경화라는 단어에서는 12~13세기 중세의 영웅담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과 이를 풍경화로 은유, 혹은 전이하여 드러내려는 화가들의 생각이 드러나고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점도 중세 고딕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경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당대 낭만주의 작품들의 양상에 큰 역설을 드러낸다. 즉,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화가들조차도 신고전주의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화의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은 역으로 그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탈피했던 종교적인 색채를 주관적인 영역에서 다시 적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것이 낭만주의가 사상적으로 오류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설. 그 자체도 사실은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역동성이 파생한 한 단면인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자기 탐구는 창조성의 발견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양식의 기원에 있어 낭만주의는 결국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억압적인 체계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미술의 측면에서 이런 억압은 표현 형식,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고 그것은 역사화로 대표되는 정형화된 미술 형식을 낳게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줄곧 염두에 두었던 창조성이라는 점은 18세기 미술이 보여주었던 다소간의 획일적인 시점에서 탈피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 예술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속성은 반항, 소외, 고통, 광기등과 같은 단어로 규정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는 개인의 창조성 탐구,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현실도피적 성격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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