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 찾기, Sergei Vasil'evich Rachmaninov,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Рахманинов,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ff | Рахманинов,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러시아어: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Рахманинов, 영어: Sergei Vasil'evich Rachmaninov, 문화어: 쎄르게이 와씰리예비츠 라흐마니노브, 1873년 4월 1일 ~ 1943년 3월 28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위키백과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율리우스력 3월 20일)에 러시아 제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가문의 시조인 "라흐만" 바실리예비치는 전설에 따르면 슈테판 3세의 손자이다.[1][2]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육군 장교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외할아버지는 제국군 장성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는 결혼 지참금으로 부동산 다섯 개를 들고 왔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는 3남 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3][4][5]
라흐마니노프는 네 살때 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6]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는 아들이 한 번 들은 멜로디를 틀리지 않고 치는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에게 이야기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친할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생을 고용해 집에서 하숙시키며 라흐마니노프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도록 하였다.[3]
이렇게 고용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선생은 1883년 10살의 라흐마니노프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이즈음 라흐마니노프의 누이 소피아가 디프테리아로 죽고, 아버지는 가족을 남겨두고 모스크바로 떠난다.[7] 라흐마니노프의 외할머니는 열성적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로, 종교적인 삶에 중심을 두고 라흐마니노프를 교육했다.[8]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는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조카와 라흐마니노프의 진로에 대해 상담했는데,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모스크바 음악원에 보내 니콜라이 즈베레프를 사사할 것을 제안했다.[9] 라흐마니노프는 1885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라흐마니노프는 1892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1895년에 1번 교향곡을 완성한다. 이후 2년간 작품을 공개하지 못하다가 1897년에 발표되었는데, 여러 가지 혹평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체자르 큐이는 이 작품이 마치 야훼가 이집트에 내린 재앙 7개와 같으며, 지옥에 음악원이 있다면 그 음악원의 수감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악평을 남겼다.[10] 초연을 지휘한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 대한 혹평은 없었으나[11] 글라주노프가 이 곡을 분석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초연 당시에 취해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2][13][14]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00년부터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의 도움을 받아 회복에 들어섰다. 라흐마니노프는 1900년 1월부터 4월까지 매일같이 상담을 받았는데, 수면패턴부터 식단까지 전부 니콜라이 달의 조언을 받았다.[15] 같은 해 여름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영감을 얻어 다시 적극적인 작곡 활동을 재개하였다.[16] 이듬해 4월에 완성된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역시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된 것이다.
1905-1906년에는 모스크바 황실 극장 지휘자를 거쳐 미국 및 유럽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곧 라흐마니노프의 재산도 몰수당하였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북유럽에 머물러있다가 미국에서 지휘자의 자리를 제안받고 건너가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43년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기량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뒤늦게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다. 전설적인 기교와 13도의 음정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만큼 컸던 손 등에 힘입어,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연주한 자신의 음악이나 일반적인 레파토리 곡들의 연주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또한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 # 후기낭만파경향과 고전음악 경향을 절충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1873년 4월 1일 러시아 제국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출생하여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했다.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5]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페루초 부조니, 요제프 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피아니스트의 정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6] 피아노 협주곡 4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이외의 곡도 다수 작곡했으며, 피아노 협주곡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에 가까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나[7] 〈보칼리제〉 등의 곡도 광고 등에 흔히 등장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나무위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주 스타로루스키에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총 3남 3녀를 낳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그중 4번째 자식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부친은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이었으며 모친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로 결혼시에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유복했다.
다른 상당수의 유명한 음악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어린시절부터 일찍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세 때 자청해서 피아노를 배운 이후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랴빈의 에튀드 5번을 무려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로는 2, 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8]
그 후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으며[9] 그 충격으로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10] 이 때문에 이 곡은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다.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11]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이 명작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12]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13]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을 고친 방법은 '자기암시 기법'[14]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
이 곡은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박사[15]에게 헌정되었으며,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1901년 11월 09일 초연되었다.[16]
뒤이어 1909년에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악보와 함께 듣기) 이 곡은 연주하기 어려운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유명하며,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17]
영화 샤인에서는 데이비드 헬프곳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분열정동장애를 일으켰다고 묘사된다.(헬프곳의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연주 듣기)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리고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라흐마니노프의 피협 3번 레코딩이 존재한다.[18] 그중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 직접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호로비츠의 연주들이 유명하다.[19] 연주의 난이도로 특히 유명하긴 하지만 작품성도 이전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실험적인 부분이 돋보이는 훌륭한 곡이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공산화되자 일단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매우 높게 샀는데,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적은 수의 작품만을 작곡하였다. 급격히 변해가는 음악계에서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로서는 장 시벨리우스가 그러했듯 점진적 절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미국으로 망명간 이후 소련 정부와 그와의 관계는 대체로 나빴지만[20] 그래도 조국이라는 생각은 있었는지 말년에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군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어 그 수익금을 소련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 당국의 요청으로 귀국을 고려하였던 듯하나,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다.[21] 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큰 나머지, 2~3년 정도의 연습을 통하여 정식으로 연주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 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큰 손은 마르팡 증후군[22]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이와 더불어 손가락의 관절도 굉장히 유연해서 오른손 2, 3, 4, 5번 손가락으로 도-미-솔-도의 C코드를 짚은 뒤 엄지를 손바닥 아래로 밀어넣어 1옥타브 위의 미를 짚을 수 있었다.[23]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24] 그렇기에 그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을 주제로 하는 이런 연주 겸 콩트도 있다.[25]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인기를 끈 이유가 '큰 손'뿐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고 유연한 손으로 구사할 수 있는 기교, 테크닉적 완성도'와 '큰 몸으로 낼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있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 작곡가로서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26] 그러나 작곡가 본인의 해석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연주자들의 해석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라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임의의 편집이 가능한 피아노롤은 정직하지 못한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 왜곡이 많이 이루어졌으니 걸러 들을 것.[27]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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