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 찾기, 귀주대첩, 고려거란 전쟁
1019년 2월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배압의 거란군을 크게 이긴 전투.
귀주대첩, 전쟁의 배경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은 거란이 고려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철군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1012년 4월 양국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 이전과 같은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였는데, 성종(聖宗)이 그 전제 조건으로 현종(顯宗)의 친조(親朝)를 요구한 것이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6월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파견하여 현종이 병에 걸려 친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공지의 이야기를 들은 성종은 분노하였다. 그리고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군), 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 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를 공격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성종이 공격을 선언한 지역은 강동6주에 해당한다. 고려와 거란은 강동6주를 두고 1012년~1014년에 걸쳐 여러 차례 사신을 교환하였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고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고, 고려는 1014년 8월 송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 회복을 시도하였다. 거란은 1014년 10월 통주를, 1015년 1월 흥화진, 통주, 용주를, 1015년 9월 통주, 영주(寧州, 평안북도 안주시)를, 1016년 1월 곽주를, 1017년 5월 흥화진을 잇달아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매번 영토에 침입한 거란군을 막아냈으나 장수와 군사, 물자가 계속해서 소진되었다. 지속된 전투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1018년 10월 성종은 동평군왕(東平郡王)이자 매제로 대송(對宋)전쟁과 거란의 제2차 침략에 전공이 있는 소배압(蕭排押)을 도통(都統)으로 삼아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도통은 원정군이 편성되면 임명되는 총사령관으로, 주로 공신, 종실(宗室), 대신(大臣) 중에서 선발되었다. 도통과 함께 원정군의 지휘부를 담당하는 부도통(副都統)에는 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렬(蕭虛列), 도감(都監)에는 동경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가 임명되었다. 소배압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진군하였다. 이와 함께 거란은 고려 변경에 위치한 성에 글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흥화진 전투
거란군이 움직이자 고려도 대응에 나섰다.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고 208,300명의 군사를 주어 영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1018년 12월 거란군이 흥화진에 도달하였다. 강감찬은 기병 12,000명을 흥화진 근처의 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흥화진 동쪽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았다. 예상대로 거란군은 삼교천을 건넜는데, 소배압은 변경의 성을 우회하여 곧장 개경을 공격하려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거란군의 도하가 시작되자 고려군은 막아두었던 강물을 터뜨렸고,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12,000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귀주대첩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연주(漣州, 평안남도 개천시)와 위주(渭州, 평안북도 영변군)를 거쳐 1019년 2월 귀주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 도착하면서 거란군의 철군 경로가 차단되었다. 이제 거란군은 고려군을 제압해야 국경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양국의 군대는 귀주성 동쪽 교외에서 두 곳의 강을 두고 대치하였다. 몇 번의 충돌이 있었으나 승부는 판가름 나지 않았다. 거란의 대다수 장수는 고려군이 두 곳의 강을 모두 건넌 뒤 어수선한 상황이 되면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는 두 곳의 강을 건넌 고려군은 퇴로가 없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므로 이기기 어려우니 고려군이 두 강의 사이에 도달하면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배압은 야율팔가의 주장에 따랐다.
양군의 교전이 재개되었다. 거란군은 야율팔가의 주장대로 고려군이 두 강의 사이에 도달하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때 개경을 방어하던 김종현의 군대가 거란군의 후방에 나타났다. 이를 본 강감찬은 김종현의 군대와 함께 양쪽에서 거란군을 몰아붙였다. 이와 함께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며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고려군은 이를 승리의 징조로 여겨 사기가 올랐다. 거란군은 기세를 탄 고려군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소배압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까지 추격을 이어갔고,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한편 말, 낙타, 병장기 등 다량의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사(遼史)》에서는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패배하였다는 뜻에서 다타지패(茶陀之敗)라고 하였다. 현종은 귀주에서 대승을 거둔 강감찬과 그의 군대를 영파역(迎波驛, 황해북도 금천군)까지 나가 맞이하여 직접 연회를 베풀고 상을 내리며 찬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거란은 귀주에서의 패배로 군사력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清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또한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의 다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 우피실군은 거란 황실의 시위군(侍衛軍)에서 비롯된 상비군이었다. 주력 부대의 상당수를 잃은 것이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하였고, 야율구리사(耶律歐里思)의 부대만이 온전하였다.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자를 보내 ‘네가 적을 가볍게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얼굴을 어찌 다시 볼 것인가? 마땅히 네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고 죽일 것이다.’라며 크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1019년 3월 소배압이 귀환하자 성종은 군율을 어긴 죄를 지적하고 면직시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다.
고려의 문관이자 장군.
현종을 보좌하였으며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도통사로서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귀주대첩의 압도적인 전과와 여요전쟁이 고려와 동아시아 전체에 미친 영향을 고려했을 때, 한국사 전체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 신라의 김유신, 조선의 이순신 등과 같이 명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고려사》에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이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5]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6]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7]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나무위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9]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는데, 찬(贊)의 오기로 보인다.[10]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1]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12] 강궁진(姜弓珍)이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3]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14]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5]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6]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17]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8]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는 논의가 나올 때 강감찬이 일전에 논의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1010년(현종 1년)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는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강감찬(姜邯贊[1] 또는 姜邯瓚[2], 948년 음력 11월 19일~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다. 본관은 금주(衿州)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1019년(현종 10년)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졌다. 1020년(현종 11년)에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가 되었고 1030년(현종 21년)에 문하시중이 되고 1031년(현종 22년)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위키백과
거란의 2차 습격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하공진(河拱辰)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楊規)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다.
1018년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內史侍郞) 동 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될 때 왕이 고신장에 "경술년(현종 원년, 1010)에 거란 오랑캐가 전쟁을 일으켜, 한강(漢江)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노라.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이 되었으리."라고 쓰니, 당시 사람들이 큰 영예로 여겼다.
거란의 3차 습격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1019년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에 식읍 3백호가 되었다. 1030년에 문하시중에 올랐고 1031년(현종 22년)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1031년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松泉, 인생글, 바라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라보기, 찾기, Muad'Dib., 무앗딥, Dune2, 듄2 (0) | 2024.03.12 |
---|---|
바라보기, 찾기, Gom Jabbar, 곰자바, Dune2, 듄2 (2) | 2024.03.12 |
바라보기, 찾기, 주주총회 소집 통지서, 실무적 입장에서... (0) | 2024.03.12 |
바라보기, 찾기, 理事會, 이사회, (2) | 2024.03.12 |
바라보기, 찾기, Annual general meeting, 株主總會, 주주총회, (0) | 2024.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