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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泉, 인생글, 바라보기

바라보기, 찾기, 不俱戴天, 불구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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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찾기, 不俱戴天, 불구대천





#不俱戴天

不 아니 불

俱 함께 구

天(머리에) 일 대

天 하늘 천

하늘(天)을 같이(俱) 머리에 이지(戴) 못할(不) 사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선 안 될, 의역하자면 절대 같이 어울려 살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증오하는 사이.-나무우키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절천지원수(絶=切天之怨讎)' 등의 관련 표현이 있다.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라고도 한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는 표현을 쓴다.

원전은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 나오는데, 해석하면 아주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구절이다.
父之讐/不與共戴天
부지수/불여공대천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이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하)고


兄弟之讐/不反兵
형제지수/불반병
형제의 원수(와 마주치면 바로 무기를 써 쳐죽여야 하니까)
무기를 (가져오기) 위해 (가던 길을) 돌이키지 말 것이며



交遊之讐/不同國
교유지수/부동국
벗의 원수(와는)
나라를 함께 할 수 없(으므로 나라에서 쫓아내거나 죽여버려야 한)다.


지금도 조금은 남아있는 옛 중국인의 복수 문화를 알려주는 사자성어이기도 하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으며 30년 전 복수라도 하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 와신상담이란 말처럼 무언가 치욕을 당했으면 어떻게든 갚기 전엔 쓸개를 핥고 불편한 잠자리를 취하며 수십 년 동안 이를 갈며 잊지 않고 복수를 준비하는 게 그 당시의 통념이었다.

서구권에서는 카눈, 벤데타라는 개념이 존재했다.[2]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가문에 중대한 해를 입힌 대상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해야 한다는 사상. 허나 복수는 복수를 낳고 복수를 당한 대상은 또다시 복수를 당하는 등 무한한 복수의 연쇄를 반복했다.


#Archenemy
'으뜸', '근원적'이라는 뜻의 접두사 Arch-와 적을 뜻하는 단어 Enemy의 합성어로써 최악의 숙적, 철천지원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뜻의 단어이다.


archfoe, archvillian, (arch)nemesis라고도 쓰인다.

arch는 접두사이므로 다음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가 없으니 유의하자. 이 접두사는 그리스어, 라틴어에서 비롯된 단어로, 영어의 grand와 유사하게 쓰이는 접두사. 용례로는 가톨릭에서 대주교는 grand bishop이 아니라 archbishop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서구 봉건제에서 대공을 뜻하는 단어는 Grand Duke가 쓰이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대공의 경우 archduke라고 칭한다.

arch의 발음이 /아크/, /아치/로 2가지이기 때문에 처음 보았을 때에는 발음이 헷갈릴 수 있다. 같은 뜻의 arch여도 archangel은 /아크/로 읽고 archduke는 /아치/로 읽기 때문. [1]


라이벌과 비슷해 보이지만, 라이벌은 서로 공감하는 지향점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인물을 의미한다.[6] 물론 라이벌임과 동시에 아치에너미인 관계도 있을 수 있지만 라이벌이 곧 아치에너미인 것은 아니다.[7] 아치에너미는 라이벌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가장 악랄하며 악연이 깊은 상대거나 경우에 따라 제일 많이 상대한 적으로 나온다. 즉 라이벌은 악역이라도 원한 관계나 어그로를 끄는 것이 없고 정정당당하게 주인공과 싸우고 서로 간의 생각과 사상을 공유하는데 비해 숙적은 악역이면서 비열하고 야비한 짓을 일삼고 증오심과 대면하면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른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치에너미는 주인공에게 있어 가장 비중이 큰 적이기 때문에 결국 최종 보스가 되는 경우도 있다.[8] 최종 보스가 다 아치에너미인 것은 아니고, 중간 보스 내지는 중요 간부 역할을 맡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오히려 최종 보스란 어느 인물의 숙적이라기보다는 그 세계관 전체의 공적이기 때문에 아치에너미와는 확연히 다르다. 한 예로 슈퍼맨의 아치에너미는 렉스 루터지만 최종 보스는 둠스데이나 다크사이드이다. 하지만 최종 보스 역시 주인공과 더불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주요 인물이기 때문에 아치에너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인공과의 관계가 중요하기는 하다.[9][10]



#견원지간

직역하면 개와 원숭이의 사이라는 뜻.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나쁜 관계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는 서유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랑진군이라는 자가 개들을 데리고 천계의 골칫거리인 손오공을 잡으러 수렴동에 가서 개들을 풀어 손오공의 부하 원숭이들을 공격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말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일부 선후배 또는 상사와 부하 사이 등등이다. 또는 서로간에 소송전을 벌이는 경우, 갖은 비난과 비방을 일삼는 경우 등이 있다.

잘 사용되지는 않지만, 견묘지간(犬猫之間)이라는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말이 있다.[1] 개 vs 고양이의 사례[2]와 내용을 봐도 나름 잘 응용한 편. 또한 빙탄지간 역시 의미가 매우 유사한 말이다.


#벤데타

이탈리아어로 복수라는 뜻이지만, 단순한 복수보다 조금 더 지독한 단어이다. 일반적인 복수는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용서를 하기도 하지만 벤데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이 목숨을 바쳐서 꼭 해내야 될 보복' 정도로 인식된다.


개인 대 개인, 혹은 가문 대 가문으로 벌어지는 전쟁에 가깝다.Feud 참조 특히 코르시카나 시칠리아 지역에서 많이 행해졌다. 영화 대부 시리즈에서 종종 묘사된다. 과거에는 벤데타를 해낸 마피아 조직원을 힘든 일을 해냈다는 뜻에서 '존경받는 남자(A man of respect)'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이탈리아인이면서 마피아가 아닌 사람이 벤데타에 성공하면 크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조직이라면 동료에게 도움을 받거나 남겨진 가족을 보호받을 수 있지만 개인이 벤데타를 행하려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하고 그 과정 또한 매우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벤데타 문화가 발달한 지중해권에서는 사소한 개인간의 마찰에 벤데타 같은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복수가 따라오진 않는다. 벤데타는 개인으로선 용서하고 넘어가고 싶어도 그러기 힘든, 가족, 가문, 지역, 직종 등 집단 단위로 원한을 샀을 때 일어난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서로 용서하고 넘어가고 싶어도 소속 집단 전체의 명예가 걸려서 피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벤데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속 양가 원수관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벤데타 문화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한 후 이탈리아 왕국 시절 대대적인 마피아 탄압으로 마피아의 세가 크게 꺾이고,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토가 엉망이 되며 사그라들었다가 전후 이탈리아 공화국에서 공권력이 강화되어 이러한 위법행위를 강하게 처벌하고 치안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마피아들과 전쟁을 벌여 축출해내는데 성공하면서 현대에 들어선 거의 사라졌다.

본래 이탈리아어지만 영어로도 흡수가 되었는데 이는 후일 마피아로 발전하는 코르시카 사람들의 거친 기질과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이 단어가 등장했던 게 크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에서도 이 단어가 언급된다.

서구 대중문화에서 자주 언급된 덕에 뭔가 비장하고 멋있어 보인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상은 공권력이 약하거나 공정하지 않은 곳에서라면 인류 문명 어디서든 나타나는 일종의 전근대적 인습이다. 알바니아에도 카눈이라는 비슷한 관습이 있고 다른 발칸반도 국가인 그리스, 보스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코소보에도 있으며, 특히 세르비아에서는 크르브나 오스베타(Крвна освета, Krvna osveta)라고 불리면서 굉장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진다.

이슬람 및 인도의 명예살인과 연관짓지만, 이 둘은 가족/친족 공동체의 '외부'에 대한 폭력과 '내부'에 대한 폭력이라는 차이로 구분된다. 벤데타는 공동체의 외부에 있는 적을 향한 사적 보복인데 비해 명예살인은 공동체의 내부 구성원에 대한 사적 처벌인 것이다.

그러나 코르시카 등 남이탈리아의 벤데타 개념을 상세히 소개하여 이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보면 이탈리아의 산적 두목 쿠쿠메토의 패거리 이야기에서 명예살인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산적 무리가 자신의 연인을 윤간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 산적 똘마니가 차라리 자기 손으로 연인을 살해하자 동료 산적들 뿐 아니라 살해당한 아가씨의 아버지까지도 그것이 아가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살인이었다고 인정하는 것[1]. 결국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벤데타나 카눈과 같은 복수든, 명예살인이든 결국은 같은 논리와 행태에서 서로 다른 측면을 일컫는 것이라 봐도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비교적 최근인 90년대와 스페인 당국과 ETA가 총질하던 시기에도 종종 볼수 있는 문화였다. 중앙 국가 권력과 법치는 약한데 전근대의 친족, 직업 집단이 근대화 과정에서 각종 이념 투쟁에 휘말리면서 각종 노동조합이나 지역 공동체 집단이 바로 무기까지 손에 넣고 힘 없는 국가가 못하는 노사분규, 지역사회 갈등 해결을 주도하면서 공동체의 폭력적 사적 복수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내전기 이전 하루가 멀다고 아나키스트, 경찰, 헌병대, 기업의 용역 깡패들이 서로 폭탄던지던 1920년대 바르셀로나가 전형적인 예이다. 남부 안달루시아에서도 소작농 전투노조, 지주 용역깡패들이 서로 피의 보복을 하게 되었고 결국 스페인 내전의 거대한 폭력 사태로 터졌다.

튀르키예나 캅카스 지방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다. 특히 체첸이나 인구셰티야 공화국, 다게스탄에서 복수문화가 아주 강하다. 미디어를 통해 이탈리아의 사례가 가장 유명해졌을 뿐 국가 권력이 약한 와중 이런 친족, 업종 중심 공동체가 모여 폭력으로 복수를 하며 가부장적 의미로 '명예'를 쌓는 반골 집단주의 공동체 문화는 지중해권 전역의 보편적인 인류학적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지중해권은 라틴-슬라브-아랍-베르베르, 기독교-이슬람 같은 외향적 차이보단 이런 사회문화적 풍습으로 서로 연결되는 점이 많다는건 페르낭 브로델 시절부터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땅 넓고 가문이나 지역 공동체별로 뭉쳐야 할 일이 많던 전근대 중국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었다.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강호의 은원관계' 같은 것이 그런 전통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다만, 중국의 복수 문화는 서구권의 복수 문화와는 약간 다른점이 있는데, 서구권의 복수는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에 비해 중국의 복수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남을 위해서' 대신 복수해주는 이들을 협객이라 부르며 숭상했다는 점이다.
협객은 그 행하는 바가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하다. 이미 약속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며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은채 남의 위급함을 돕고, 사생존망의 위급함을 겪었어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기』 유협열전

중국의 복수 전통(협객 전통)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범(典範)이라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닌 사마천의 사기에는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사기의 자객열전에서 다루는 인물로 중국 협객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형가나 예양의 사례를 참고할수도 있을 것이다. 형가는 남의 나라를 구해주기 위해 다른 나라 왕을 암살하려고 한 인물이고, 예양은 자신이 섬기던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다른 군주를 암살하려고 한 인물이다. 즉 자신이나 가족, 가문, 아니면 잘해야 소속 조직의 원한을 갚기 위한 복수인 벤데타와는 그 동기가 명확히 다르고, 사적 복수의 논리로는 어찌보면 '그걸 왜 네가 나서냐?'라는 의문이 들만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복수 전통에서는 그 동기의 정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남이 대신 복수에 나서주는 것도 정당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흔히 인식하는 벤데타의 전형이 자신이나 자기 가족, 가문이 입은 피해나 모욕에 대해 직접 되갚아주겠다고 보복하는 것이라면, 협객의 전형은 '평소에는 공짜 술, 밥이나 얻어먹고 거들먹거리던 파락호, 건달'인데 그 지역에 살던 '힘없는 민초 아무개가 지주나 지방 벼슬아치 등 유력자에게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한을 대신 풀어주겠다며 자기네 건달패를 모아 목숨걸고 그 유력자 집에 쳐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한나라 시대에도 이런 행태가 바람직하게 여겨지던 것은 아니었다. (협객은 그 행하는 바가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 나름의 정당성과 가치를 인정할만한 면 역시 있다고 보았기에 유협 집단과 자객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역사기록에 따로 남긴 것.

그리고 벤데타 전통과 협객 전통이 보이는 이러한 차이는 서로마 멸망 이후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바깥에 머물렀던 남이탈리아 지역과, 역사적으로 가장 빠르게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어 오랜 기간 유지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히는 중국 사이의 역사적 경험 차이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남이탈리아 뿐 아니라 발칸,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 벤데타와 유사한 복수 전통이 뚜렷하게 형성된 것으로 유명한 많은 지역들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행사하는 공권력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가족/가문이나 부족/씨족 중심의 자치적 공동체의 전통적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들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사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강력한 공권력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났던 것. 물론 이 공권력이란 어디까지나 전근대의 공권력, 즉 현대 국가의 공권력과 같이 공정하고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복하는 문화가 생긴 것이다.

한국은 중앙집권 때문에 비교적 복수 문화가 적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수도권에서 접근성이 좋은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정도만 해당되고 함경도나 평안도, 황해도 북부, 그리고 간도(오늘날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나 남한이더라도 부산 일대같이 서울과 멀리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역은 복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2][3]역시나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으로 자기 부인을 강간하거나 자기 부인과 간통한 남자를 현장에서 살해하는 것(자기 부인까지 포함)하는 것은 용인되는 문화도 있었고, 특히 효도, 정절을 위한 복수는 사면은 물론 표창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 해방 직후에도 히키아게샤를 폭행하거나 재산을 뺏는 건 물론 살해하는 일까지 있었고 서북청년회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가문과 지역 공동체, 국가와 민족에 관련된 문제는 어느정도 복수를 용인해줬다 할 수 있다.

상술된 대로 해당 문화권에서도 벤데타 걸리는 상황은 애초에 본인이 관대하게 넘어가고 싶어도 외부에서 "니 가족/친구/직장/고향의 명예는 생각 안 하냐?" 같은 집단적 압박이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제약적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만약 어떤 사람이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결심한다면 주변에서는 "저 사람은 관대한 대인배구나!" 라고 존경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속한 집단은 호구구나! 마음껏 괴롭히고 빼앗아도 되는구나!" 라고 만만하게 보고 먹잇감으로 삼으려 든다는 것. 이러니 해당 문화권에선 21세기가 되어도 피가 피를 부르는 사적 복수 문화가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다.

이러한 복수-집단적 명예 문화는 주로 '공권력이 부재한, 또는 미약한 상황에서 가족/가문등의 집단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들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사실 이조차도 딱 잘라 말하기는 애매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기나긴 역사 내내 공권력 하나는 짱짱센 세계구급 선두주자이던 중국에서도 복수 문화는 (조금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을지언정)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공권력이 강하냐 약하냐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가 그 신뢰성이다. 공권력이 공정하고 신뢰성있다면 사회 구성원들로써는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보다는 공권력에 맡기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공권력이 무력하다면 뭐 말할 가치도 없고, 무력하지 않더라도 공정하지 못하고 신뢰할 수 없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당연히 자신의 문제를 그런 믿을 수 없는 공권력에 맡기지 않으려 하게 되는 것이다.

상기된 것처럼 중국의 복수 전통인 협객 전통에서 공권력과 충돌하는 반체제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 것은 결국 동시대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강력한 공권력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하지만 그 공권력이 민초들의 편은 아니었던 중국사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며, 이는 본 문서의 주제인 벤데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벤데타 문화의 본고장인 시칠리아, 코르시카 및 남이탈리아 지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상실 이후 이슬람 세력, 신성로마제국, 카탈루냐, 스페인, 프랑스, 통일 이탈리아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자 쟁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물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저러한 지배세력은 모두 '외부 세력'이었던 것이다. 전근대의 기술적 한계 속에서 이들 외부 세력은 남이탈리아 지역을 간접적으로 통치, 통제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또는 자신이 속한 가문이나 집단의 문제를 '외부 세력(=이방인)인 상위 권력'에 맞기기보다는 자신들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자신들의 방법으로 스스로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때문에 복수-집단적 명예 문화가 두드러진 다른 부족/씨족 문화권 지역에 비해 비교적 체계화된 중앙권력(=공권력)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중해 문화권이면서도 벤데타 문화가 두드러지게 발달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 당장 벤데타 문화의 형성과 떼놓을 수 없는 조직인 마피아만 보더라도 (근현대적 범죄 조직으로 발전하기 이전까지는) 지역 사회와 유착한 자치적 자경집단으로써 반 외세적 성격을 얼마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긴 기간동안 당당히 사회문화의 한 영역에 자리잡고있던 복수행위 근현대 이후 급속히 사적제재로써 범죄시되기 시작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근대국가는 '공권력'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의 독점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국민국가'로써 국민에 의한 국가이자 국민을 위한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상적인 (최소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근대 국민국가에서는 공권력이 (그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객관적이면서 공정한 심판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에 더이상 벤데타와 같은 사적 복수가 필요하지 않고, 이러한 공권력에 의한 심판은 주관적인 사적 보복보다 더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겨지기에 사적 제제를 금지하고 공권력으로만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권력을 얼마나 신뢰할지는 사람마다 그 생각이 다르기에 현대에도 사적제재에 의한 복수행위가 통쾌한 정의구현이라 보는 이들, 혹은 그 정도는 아니라도 나름의 정당성은 가지고 있다거나 필요악이다, 또는 공권력의 부족함이나 과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적지 않다. 당장 한국은 세계 기준으로 봐도 치안수준이 높은 선진국에 속하지만 한국인 중에도 사적 복수를 통쾌하게 여기며 사이다를 외치는 이들의 수가 그리 적지만은 않은 것.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전쟁 역시 국가 단위로 벌이는 복수에 해당하기에 규모만 큰 벤데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으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타국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압박을 당하고 있(다고 국민들이 느끼)는 경우, 먼저 군사적으로 도발을 당하거나 자국민이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발생하면 '우리도 호구가 될 수는 없다'며 보복을 요구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것은 전형적인 복수의 논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전근대 사회에서는 가문이나 소규모 공동체 단위로 벌이던 벤데타가 국가라는 정체성 하에서 대규모로 벌어지는 것일 뿐, 똑같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물론 이는 그리 신기한 논리는 아니다. 상기된 바와 같이 애초에 근대국가의 논리 자체가 '국가가 모든 폭력을 독점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국가는 정치적 논리로 이 폭력의 독점적 행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치국가의 논리는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따라 행사되는 국가의 공권력이 개개인의 사적 폭력에 의한 복수와 자구책보다 더 공정하기에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고, 근현대 민주국가의 논리는 '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하여, 그 국민의 의사에 따라 그 주권(의 일부인 공권력)을 행사하면 그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민족국가의 논리로 국가의 구성원(민족, 또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익을 실현하는데 가장 바람직하다면 국가의 폭력 독점 역시 정당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그것을 행사하는 주체가 무엇이건 폭력은 폭력이기에 그 본질적인 성격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을 근거로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은 정당한 공권력이지만 국가가 아닌 것(개인, 또는 가족이나 가문, 또는 각종 단체 및 조직)이 행사하는 폭력은 사적 폭력이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그 구성원들을 대신하여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논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 논리에 대한 반론 역시 상당하고 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해당 논리가 현대 사회의 보편적 전제중 하나로 기능하는 논리인 것 역시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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