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松泉, 인생글, 바라보기

바라보기, 五臺山 月精寺, Woljeongsa, 오대산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728x90
반응형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오대산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인 팔각구층석탑으로 유명하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자장이 중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문수보살을 만난 뒤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고자 정진하던 터라는 전설이 있다. 자장과 선덕 콤비는 황룡사 목탑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 고려 충렬왕 33년(1307년) 화재로 절 전체가 타버린 것을 다시 재건했고, 조선 순조 33년(1833년) 또 다시 다 타버린 것을 헌종 10년(1844년)에 다시 중건했다-나무위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송나라의 탑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1] 또한 정릉사나 청암리 사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계열의 석탑으로도 보는데 고구려계의 목탑과 같은 팔각형의 형태도 있다. 가람배치도 그렇고, 탑도 그렇고, 고구려계의 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남한에는 이와 같은 탑이 남양주 수종사에 있는 팔각오층석탑만 있다.[2]

팔각구층석탑은 그 자체 형상도 대단히 화려하고, 고려 귀족문화를 반영하듯 풍경이나 머리장식 등에서 드러나듯이 장식적으로도 발달해있다. 또한 탑은 높이 15.2 m로 결코 작지 않은 데다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일반적인 탑의 모양과는 달리 아래층 지붕과 위층 지붕의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층 간의 높이나 전체적인 비례가 상당히 조화롭게 디자인되어 단지 높다는 인상을 주지 균형감이나 안정감이 약하다는 느낌은 덜하다.

한 가지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월정사의 다른 건물들이나 문화재들이 한국 전쟁의 화마에 모두 완전 소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팔각구층석탑의 풍경 장식(청동제이다)이나 탑의 맨 꼭대기 지붕돌 위에 있는 머리장식(금동제이다)의 형태가 완벽하게 남았다는 것이다.[3] 이렇게 살아 남은 장식들은 고려시대 석탑이나 금속공예 등의 관련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4] 탑에 달린 장식들이 청동이나 금동으로 만들어져서 큰 화재에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절이 전소되는 와중에도 천만다행으로 살아 남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가, 석조보살좌상이 국보로 승격 지정되면서 제48-1호로 재지정되었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배치되어 있던 1.8m 크기의 석조불상이다. 원래 팔각구층석탑을 바라보게 석탑 앞에 모셔져 있었으나,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석조보살좌상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만든 보살상 복제품을 모셔놨다.

석조보살좌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세트로 만들어졌거나 월정사가 건립된 11~12세기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보살인지도 불명확한데, 약왕보살 또는 문수보살 등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높은 관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대좌 위에 앉아서 오른다리 무릎은 땅에 대고 왼다리 무릎은 세우고 모여 있는 손의 왼팔은 세워진 왼다리 무릎에 올려져 있다. 전면에 모인 두 손 사이로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여기에 무언가를 꽂아 보살이 이를 탑에 바치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가 몸통에 비해 다소 크게 만들어져 있어서 불상의 전체적인 비례가 잘 맞는 편은 아니지만, 조각 기법은 우수하다.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 보살의 표정, 머리에 새겨진 머리카락과 귀걸이 또는 몸통에 새겨진 복식 같은 장식들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큼에도 불구하고 보살이 앉아 있는 자세도 안정감 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비슷한 불상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과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7호)외에 논산 개태사, 원주 법천사지 등에서 드물게 보이고 있다. 이런 불상들은 모두 사람 또는 보살 형태의 공양상이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처럼 탑을 향해 앉아 있다. 탑 앞에 불상을 두는 이러한 배치 형태는 한반도 외에선 상당히 드문 형태이며, 한반도 내에서도 강원도 외의 다른 지방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데, 강원도 지방 사찰의 독창적인 특징으로 여겨진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본래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7년 1월 2일 국보 제48-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국보 승격 사유로 '보살상과 세트로 조성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조보살상은 보물 제139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별개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묶어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상은 팔각구층석탑의 남쪽 전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민지(閔漬, 1248∼1326)가 찬한『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전해오기를 이 석상은 절 남쪽의 금강연에서 솟아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이에 따라 이 보살상은 대체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6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근거하여 조성된 ‘약왕보살’로 일컫는다. 석조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와 알맞은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보관과 귀걸이, 팔찌, 가슴 영락 장식 등 세부표현도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은 탑전(塔前) 공양보살상은 이전에는 찾기 힘든 고려 전기적 특징인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도상과 구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려 불교조각의 지역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보살상과 세트로 조성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고, 석조보살상은 보물 제139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별개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이미 국보로 지정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묶어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조성 당시의 조형적, 신앙적 의미를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월정사에는 유명한 책이 하나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판)을 가지고 찍어낸 대장경으로, 근처 상원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월정사로 옮긴 것이다. 단,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판'이며,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인쇄를 위한 목판이다.

월정사에 있는 판본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찍은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판본은 남아있는 것이 몇 개 전하지 않는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





휴식을 위한 자연과 사찰로써는 완벽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