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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蔡文

지채문

고려의 중흥지주였던 제8대 국왕 현종 시대의 무장 및 관료로서 봉산 지씨(鳳山 智氏)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어린 시절의 생애는 알 수 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맹활약하여 역사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거란(요나라)[4] 제국의 제6대 황제이자 명군이었던 성종 야율융서가 일으킨 제2차 여요전쟁부터였다 -나무위키



고려 현종 시기에 중랑장[5]으로 임명되어 직무에 임하던 중에 거란의 제2차 침공을 맞게 되었다. 이때 지채문은 현종의 명령을 받아 군대를 통솔해 화주[6]에 진을 치고 동북면을 방어하던 중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대군이 통주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해 서경이 위험해지자 현종의 명령으로 서경을 지원하러 출전하게 되었다.

당시 서경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서경 내부에서 거란에 대한 항복론이 우세했던 것이다.[7] 그래서 거란군의 사절과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 항복한 노의 등의 배반자들의 설득에 따라 거란에 항복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고려를 버리고 거란에 투항하기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서경에서는 고려의 지원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지채문은 서경 내부의 내통자의 도움을 받아 서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채문이 서경에 들어갔다고 해서 서경성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는데, 서경 부유수 원종석은 지채문과 최창 등의 설득을 거부하고 항복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채문은 거란의 사절들이 거란 군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을 암살해버렸다. 한마디로 항복할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물론 서경성 내의 불안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후에 지채문이 탁사정의 동북면 군대와 합치니 서경은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고려군은 다시 임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시간을 끌기 위하여 항복 사절을 보냈는데,[8] 거란의 성종은 이를 믿고 서경에 점거할 병력을 보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채문과 탁사정이 내보낸 고려의 정예 기병들이었고, 그들은 몰살당했다. 이 승리로 인해서 고려군은 사기가 약간 올랐고, 지채문이 서경성을 나가 주둔함으로써 야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후에 거란군이 공격해 왔는데, 지채문은 탁사정과 군사를 합쳐 이들과 싸워 3,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다음날에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패주했다.



지채문은 수도 개경으로 복귀했고, 서경에서의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보낸 병력마저 상황이 그러했기에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당장 조정엔 항복론이 대두되었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물론 훗날 귀주 대첩의 주역인 당시 예부시랑이었던 강감찬이 몽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9] 현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몽진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지채문이 선뜻 앞에 나아가 임금의 호위를 자청했는데, 현종이 크게 감동했다.
"전날 이원과 최창이 도망해 와서 수행하겠다고 자청하다가 지금은 다시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신하된 도리에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는 전선에서 수고했는데 또 나를 호위하겠다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노라."

그러고 현종이 몽진을 떠나게 되었는데, 금군 50명과 왕후와 후궁, 그리고 채충순 등으로 이루어져 임금의 몽진 일행으로는 매우 단촐했다. 그런데 적성현[10]에 있는 단조역에 도착했을 때 군졸 견영이 단조역에 있었던 인원들을 모아 활을 겨누며 현종 일행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다. 다행히 지채문이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견영의 무리들을 물리쳤다.

간신히 견영의 변란을 무마시키고 현종 일행은 창화현[11]에 도착했다. 그런데 창화현의 아전[12]이 현종에게
"왕은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라며 거만을 떨며 지극히 무례한 행동을 범했다. 현종이 그의 말을 무시하자 화를 내며
"하공진이 온다."
며 소란을 피었고, 이 때문에 놀란 현종 일행의 대다수가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13] 물론 이 정도로 끝났으면 괜찮았겠지만, 결국 일이 터졌다. 다름아닌 이날 밤에 정체를 모르는 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정말 현종의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현종을 호위하던 궁인들 및 관원들도 모두 도망가 숨고 두 명의 왕후와 승지들, 그리고 지채문만이 현종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채문은 침착하게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슬쩍 두 왕후를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는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현종을 호위하며 탈출했다.

이후 지채문은 창화현에서의 일이 하공진의 수작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창화현으로 정찰을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현종에게 요청했는데, 많은 신하들이 난리 통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본 현종이 지채문을 쉽게 보내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지채문은
"소신이 임금을 저버리고 언행이 다르게 간다면, 하늘이 결단코 소신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현종을 안심시키고 허락을 받았다.

하공진의 결백을 확인한 지채문은 하공진의 병력과 함께 창화현에서 잃어버린 말과 안장을 찾아 현종이 남쪽으로 몽진하는 것을 수행했다. 이때 현종을 따르고 있었던 류종과 김응인이
"두 왕후를 각각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경위하는 장병들은 동쪽 방면으로 출동시켜 긴장된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간의 한복판에 임신한 국모들을 내버리자는 말이었다. 당연히 현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14] 지채문은 울면서
"지금 폐하와 신하들이 모두 자기 도리를 잃고, 환란을 당하여 이처럼 파천하게 되었으니 이때가 바로 인과 의로써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할 때이거늘 두 왕후 폐하를 버리고 소신 혼자만 살 길을 구하자는 발상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씀이옵니까?"
라고 간절히 간하여 현종이 이에 찬동하고, 류종의 의견을 묵살했다.[15]

이어 현종 일행이 사산현에 이르렀는데,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위하여 지채문이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에 말을 달려 기러기떼를 놀라 날아가게 한 뒤, 그중 한 놈을 마상에서 자신의 몸을 제친 상태에서 활을 쏘아 맞추어 떨어뜨린 후, 말에서 내려 활로 쏘아 잡은 기러기를 현종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으리까?"
라고 말하니 현종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후에 현종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모두 불만을 품자 이들을 포상하여 달래줄 것을 건의해 관철시켜서 장병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문제는 환란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가가 전주에 도착하니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협천자 영제후)할 생각이었는지 병사들을 이끌고 현종이 머무는 전각 앞으로 전진했는데, 지채문이 전각의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호위했다. 또한 조용겸의 수하들 중 한 명을 질책해 현종을 만나 뵙게 하고 조용겸을 따르지 않게끔 했다. 결국 지채문의 기지가 다시 현종을 구한 것이었다. 이때 박섬(朴暹)이
"전주는 (후)백제의 땅으로써 태조대왕께서 미워하셨습니다."
라는 이유를 들어 나주로 몽진하게끔 이끌었다. 또한 나주에서도 거란의 사절을 거란군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해한 야경꾼이 잘못된 증언을 해서, 놀란 현종이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바로 (거란군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는데, 지채문이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직접 정찰을 나가 이들이 거란의 군대가 아니라 사신임을 확인했다.



1016년 우상시(右常侍)로 임명되었는데, 무직(武職)을 겸하도록 했다.

1026년(고려 현종 17년) 음력 4월 24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승진했는데 같은해에 세상을 떠났다. 1031년에 즉위한 제9대 덕종 때 선왕 현종의 남행을 힘써 호위한 공로로 1등 공신에 추증되었다.


제2차 여요전쟁 때 강조에 의해 옹립된 젊은 국왕 현종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여러 번 구했던 구국의 영웅이었다. 지채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의 혼자 현종을 지켜냈다. 모두가 도망간 최악의 상황에서도 현종을 굳게 호위하고, 또 활솜씨로 현종을 안심시키는 모습을 보아 활만 잘 쏜 것이 아니라 젊은 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다.

이후 현종이 환도하여 토지 30결을 하사하며 교지를 내렸는데,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라고 했다. 현종이 지채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감찬과 더불어 환란 때 임금의 측근으로서 고려를 구한 인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귀주 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강감찬과는 달리 인지도는 낮다.[16]



지채문(智蔡文, 964년 ~ 1026년)은 고려의 무신이다. 본관은 봉주(鳳州), 자(字)는 호간(浩幹). 상장군 우복야(右僕射)에 오르고, 1등공신으로 추록되었다.-위키백과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지(智)씨가 발해의 49개 귀족성 중 하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발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거란의 2차 침입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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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년(현종 1) 거란이 침입했을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하공진과 유종과 함께 화주(和州)의 방비를 맡았다. 같은 해 하공진과 유종이 조공하러온 여진족 추장 일행 95명을 몰살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진이 이를 억울하게 여겨 거란의 요나라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하였고 그에 따라 요 성종은 여진의 협력을 약속받고“고려의 강조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워 대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라며 침입해 왔다.

요군이 서경으로 임박하자 지채문과 탁사정을 시켜 서경을 방비하게 하였다. 지채문은 탁사정과 합류하여 서경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서경이 요나라에 항복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독으로 서경으로 진군하였으나 서경은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최창이 상문 밖에서 분대어사 조자기(曹子奇)를 불러 겨우 입성하였다. 서경에 입성한 지채문은 서경유수 원종석을 만나 항복을 철회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여 최창과 상의하여 독단으로 일을 돌이킬 수 없도록 요나라 사신단을 살해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항복문서를 없앴다. 그러나 여론은 변하지 않았다. 이때 고려의 국왕인 현종 마저 요 성종에게 표를 올려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지채문은 서경 밖으로 쫓겨났으며 서경 수비군 중에서는 대장군 정충절 만이 그를 따랐다.

현종의 항복 표문을 받은 요 성종은 거란인을 새로운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1천명의 호위를 붙여 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이 대군을 이끌고 서경에 도착하여 서경을 장악했다. 때마침 요 성종이 보낸 서경유수 올름이 서경에 도착하였는데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요 성종이 임명한 서경부유수 한기를 갑자기 습격하여 이들을 괴멸시켰다. 요 성종은 노하여 선발대를 보내 서경을 공략하였으나 지채문이 이를 요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나 곧 요 성종의 본대가 도착하자 고려군을 패퇴하였고 서경은 포위되었다.

탁사정은 백전노장 대도수와 상의하여 대도수는 동문으로 출격하여 요군의 측면을 혼란시키면 탁사정은 서문으로 나아가 요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도수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 전투에서 탁사정은 성문이 열리자 마자 도주해버렸고 대도수는 사로잡혔다.

현종 호종
편집
동북면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과 합세해 서경에 들어가 거란군을 물리쳤으나 계속되는 거란군의 공격으로 서경이 포위되자 개경으로 빠져 나와 서경의 전황을 알렸다. 왕이 남행(南行)할 때 이부시랑(吏部侍郎)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을 거느리고 왕을 호종하였다.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을 때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더불어 행궁(行宮)을 범하려고 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창화현(昌化縣)에서는 현리(縣吏)가 난을 일으키자 채충순·주저(周佇) 등과 함께 왕을 피신시켰다. 이듬 해 광주(廣州)에서는 길이 어긋난 왕후를 요탄역(饒呑驛)에서 찾았다. 이어 양성(陽城)을 지나 여양현(礪陽縣)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에게 중윤(中尹)을 제수하도록 해 민심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삼례(參禮)에서는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왕을 전주에 모셔 놓고 호령을 하자, 여러 무장들이 이를 죽이려 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전주로 돌려보냈다. 여러 차례 현종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나주까지 무사히 호종하였다. 이듬 해 거란이 물러난 뒤 공주에서 호종의 공으로 전 30결을 받았다.

1016년(현종 7년) 우상시(右常侍)를 겸했고, 1026년(현종 17년)에 상장군 우복야(右僕射)에 올랐다.[1]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204850&code=kc_age_20

우리역사넷

지채문(智蔡文)은 10세기 말~11세기 초에 활동했던 고려의 무장이다. 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거란군을 피해 현종(顯宗)이 수도인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몽진을 떠났을 때, 대다수 신하들과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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