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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언어, 北魏, 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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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언어, 北魏, 북위






오호십육국시대 말기 탁발선비족이 세운 왕조로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

선비족은 영웅 단석괴 이후, 지속적으로 후한과 서진을 공격했고 5호 16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남진해 국가를 세웠다. 북위는 5호 16국시대 후기에 등장하여 제3대 세조 태무제때 화북을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를 형성했으며, 후대의 수•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는 지금의 다퉁이었다가 제7대 고조 효문제 때 낙양으로 천도했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만주의 금나라 및 청나라, 몽골의 원나라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2] 여러 제도적인 노력[3]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반면, 북위는 제7대 효문제 시절 성족상정을 실시,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개칭하고 중국 문화를 크게 받아들였다.(한화정책) 북제와 북주 시절에는 이 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한인 귀족들에게 선비족의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으나(호화정책), 선비족의 한화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수•당의 지배 계급인 관롱집단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한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북위가 일방적으로 중국 문화에 동화된 것은 아니다. [4]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魏) 혹은 대위(大魏)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라나 삼국시대의 조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과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이야기이다.

또는 황실의 성씨를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고 부르거나[5] 북방 이민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당초 중국 24사 정사에 《위서》가 《북위서》로 들어가 버렸다. 다만, 주변국에서 타브가치라고 부른 사례가 있기에 고유 명칭은 '타브가치'였을 가능성이 높다.-나무위키




북위(北魏, 386년~53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에 선비족 탁발부가 화북에 건국하여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정복 왕조이다. 정식 국명은 탑가치이지만 한자 국호는 위(魏)라고 불렸기 때문에 전국 시대 그리고 삼국 시대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후위(後魏), 선비족 탁발씨(拓跋氏)가 지배했다고 하여 탁발위(拓跋魏),이후 탁발씨가 원씨(元氏)로 개명했기 때문에 원위(元魏)라고도 한다.


261년 선비족 탁발역미가 한족들을 원정하여 정복하였다. 후세에 선비족 탁발씨가 정복한 지역에 옛 위나라가 존재했어서 위나라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부르고 있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파언탑랍(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다. 삼국을 통일한 서진은 탁발부의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의 산시 성 북부의 땅을 내어주어 살게 했다. 하지만 선비족들은 지속적으로 서진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선비족 탁발부는 세력이 강해졌다.

315년에 침략해오는 선비족을 달래기 위해 서진은 선비족 탁발의로에 관작을 주어 대나라(代)의 왕으로 봉했으나 선비족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대나라는 탁발십익건 때 376년에 저족의 국가 전진에 멸망하였다.

북위의 성립
대나라가 멸망했으나, 383년에 탁발규는 선비족들을 이끌고 전진과의 비수 전투에서 이겼고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386년에 대나라를 재건하고 전진과 화북의 한족들을 정복하였다. 이후에 탁발규는 황제를 자칭하고 타브가치를 건국하였고 한족들은 중국을 정복한 탑가치의 국호를 위(魏)라고 기록하였다. 이 탁발규가 바로 초대 황제인 도무제이다.

도무제는 지금의 내몽골 일대로 북상해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 등 기마민족들과 함께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이어서 선비족 도무제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을 벌이면서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하였고, 397년에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켰다. 398년에 수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 성 다퉁으로 옮겼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소개시켰다.

도무제는 갈족, 흉노족, 선비족의 군사로 남쪽으로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선비족 체제를 유지하였다. 피지배층 한족에 대한 차별과 학살이 존재하였다. 후세의 기록에는 선비족이 피지배 문화인 중국 한족 문화도 일부 수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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