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작가이자 극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시인이며 한때에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자, 같은 문인들에게는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문학의 신화로 여겨진다.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독일을 넘어 서양 철학과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 괴테(Johann Caspar Goethe, 1710–1781)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추밀고문관)까지 올라 평민층으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거둔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카타리 엘리자베트 텍스토어(Catharina Elisabeth Textor, 1731–1808)도 평민층이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 1693–1771)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는 출산 당시 난산이었고 산파가 조치를 제때 하지 못해 무호흡 상태에까지 빠졌었다가 인공호흡을 통해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괴테가 태어난 이후 출생한 두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버렸고 그 두 사건이 어린 괴테를 한때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무사히 잘 자라서 어린 괴테가 무척 귀여워해 줬고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여섯 형제자매 중 성인으로 자란 것은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 뿐이었다.[3]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4]
그리고 아버지는 문학에 대하여 무척 흥미를 가져서 아들인 요한이 글을 잘 썼으면 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어릴적에 요한은 무척 글쓰기에 흥미를 보여 작문학교에서 교사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며 그때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며 칭찬해줬다.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 이 책에서 밝힌 대표적인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꽃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중에서 최고수준이었다.
의외로 치의학과 해부학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괴테는 치아가 잇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치아의 뿌리가 되는 뼈대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 끝에 간악골(앞니뼈)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어권 학계에서는 이 뼈 부위를 지칭할 때 종종 'Goethe's bone'이라고도 부른다. 괴테의 발견 전까지는 간악골이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로 쓰이기도 했었다. 인간의 간악골은 유아기의 성장 과정에서 턱뼈와 합쳐지기 때문에 발견이 어려웠던 것이다. 괴테는 인간이 척추동물이고 앞니가 있는데 간악골은 없을 리가 없다고 자부했고 태아의 두개골을 연구하다 마침내 간악골을 발견했다. 괴테의 간악골 발견은 당대 유럽 학계에 피어나던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다만 여러 재능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로서의 감각은 영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16]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는 허풍까지 늘어놓았다. 물론 현대의 승자는 뉴턴 쪽이 된다. 그런데 괴테가 뉴턴의 학설을 논파하려는 과정에서 빛, 그림자, 색을 탐구하며 집필한 '색채론'은 훗날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괴테는 회화 속에서의 색 표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점이 색채론의 토대에 반영이 된 것이다.[17] 이 색채론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18]에 의해서 재조명되기도 한다.[19]
더불어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바이마르 시의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며 프랑스군과 전쟁을 대비하여 물자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 전투[20]에서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1735~1806)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참모라고 쓰고 기록 서기관이라고 읽는다.'라는 조롱까지 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괴테가 살았던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반은 그야말로 세계가 격동하는 시대였다. 그가 17살일 무렵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범세계적 전쟁인 7년 전쟁이 벌어졌고 그 여파가 미국 독립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흥망성쇠를 목격했고 후에 이어지는 빈 회의로 인한 유럽의 격변까지 몸소 모두 겪었다. 또한 그의 일생 동안 산업 혁명의 전조가 유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륙 간의 연결과 식민지 사업이 완전히 정착한 상태였다. 과학의 발전, 합리주의와 관념론 등등 여러 철학 사조와 개념의 대두, 불가침의 권위가 사라진 종교와 교회 등 괴테는 '절대적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새로운 시각이 점차 열리게 되는 시대를 살았다. 바로 그러한 배경이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문학 운동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다. 문학에서의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괴테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26] 괴테의 저작 일생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관념론과 계몽주의적 사상의 연결은 구 시대와 새 시대의 다리에 있던 그의 시대가 문학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괴테의 시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전복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기존의 정서라는 것은 금이 가고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사회 제도적인 역할로서의 결혼에 대해서도 회의가 있었다. 괴테는 신분, 재산, 나이 등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결혼의 범위'에 전혀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괴테의 연애 감정은 괴테 본인이 느끼는 사랑과 여성의 아름다움[27]에 의한 것이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전 연인 관계는 숱하게 많았던 괴테가 한 번의 혼인만 치룬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괴테와 연인 크리스티아네의 결혼 또한 순전히 당사자들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괴테가 신부를 찾아 결혼하길 종용했고[28]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괴테는 연인 크리스티아네와 아들 아우구스트의 신변에 두려움을 느꼈다. 괴테는 가족이 법적으로도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길 바랐고 그 책임감이 결혼에 대한 회의도 무르게 하여 크리스티아네와 결혼을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만들었다.-나무위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독일어: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고전주의 성향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을 읽었다. 그는 북독일계 아버지에게서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 남독일계 어머니에게서 예술 사랑과 '이야기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 오시안 ,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법률 사무소 견습생일 때 약혼자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때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게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그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이 도시를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 대표적인 교양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 색채론 ](1810),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 이탈리아 기행 』(1829) 등 완성했다. 스물네 살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 파우스트 ]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년-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1765년-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요양 중(1768년-1770년), 수산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와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졌다. 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제센하임의 목사의 딸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1771년)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 폰 베를린힝겐》(1773년)의 초고를 정리하고 다름슈타트의 요한 메르크(1741-1791)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어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1753-1828)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 및 비극 《클라비고》, 비극 《슈텔라》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위키백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이탈리아 기행》
《파우스트》
《서동시집》
시 〈프로메테우스〉
연인의 변덕
공범자들
괴츠 폰 베를리힝겐
에르빈과 엘미레
클라비고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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