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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언어, 金鰲新話, 금오신화

Songcheon, 송천 2023. 3. 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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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언어, 金鰲新話, 금오신화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시인, 작가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유응부(兪應孚, ? ~ 1456년)이 금오산(金鰲山)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이다.

《금오신화》에는 아래와 같은 다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한국 전기체(傳奇體) 소설 즉, 용궁, 저승, 신선 세계처럼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소재들로써 쓴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초기 소설의 형태로 등장인물은 모두 재자가인이며,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한가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다가 세조의 쿠데타(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세상에 나아갈 뜻을 꺽고 생육신으로 살았던 김시습,유응부의 철학이 담긴 단편소설들이기 때문에 방외인 문학이라고 불린다. -위키백과


조선전기 학자·문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용궁부연록」·「남염부주지」 5편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는 조선전기 학자·문인 김시습이 지은,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용궁부연록」·「남염부주지」 5편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이다. 창작 시기는 명종 연간으로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지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려말 조선초에 형성된 서사문학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불교 및 도교사상 등 다양한 사상적 근거 위에 나름의 글쓰기 방식을 개척하여 탄생시켰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한국소설의 출발점을 이루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본 문헌은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간혹 문헌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있으나, 대한제국 말엽까지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간행되어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崔南善)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해당 목판본은 1884년(고종 21)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것으로, 상하 2책으로 구성된 것이다.

1884년 일본 간행본은 상권이 32장으로 서(序) · 「매월당소전(梅月堂小傳)」 · 「만복사저포기」 · 「이생규장전」 · 「취유부벽정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하권은 24장으로 「남염부주지」 · 「용궁부연록」 · 발문 · 평(評)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매월당소전」과 발문 2편 가운데 1편은 한말의 정계 및 종교계에서 활약했던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쓴 것이다. 하권의 말미에는 이 책을 ‘갑집(甲集)’이라고 한 기록이 있어, 본래의 작품 수는 5편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간행된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 일본에서 간행된 판본을 중간한 것이며, 1653년 간행본의 대본은 오쓰카(大塚彦太郎)의 가문에서 오랫동안 전래되던 자료였다.

이보다 앞선 시기 조선에서 간행된 『금오신화』 목판본이 1990년대 후반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판본은 중국 다롄도서관 소장본으로, 1책의 목판본이다. 다롄도서관 소장 조선 간행본은 명종연간 간행된 것으로 보이며, 권수면 하단에 파평후학(坡平後學) 윤춘년(尹春年)편집(編輯)이라는 문구가 수록되어 있다. 중국 다롄도서관 소장본은 [양안원장서(養安院藏書)], [율전만차랑소장(栗田萬次郞所藏)] 등의 인문이 답인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약탈된 문헌이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이후 중국 다롄도서관으로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1884년 도쿄에서 간행된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1952년에는 정병욱(鄭炳昱)에 의하여 필사본으로 된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 발견되었다.

 

수록된 다섯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의 노총각 양생(梁生)과 죽은 처녀의 혼령과 사랑하다 죽은 처녀의 혼령임을 깨닫고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식을 끊었다는 내용의 애정소설이다. 「이생규장전」은 전반부에서는 이생과 최랑(崔娘)이라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었다. 후반부에서는 홍건적에게 최랑이 죽자 현세에서의 사랑을 다하지 못하여 병이 들어 죽는다는 내용으로 죽은 여자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이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주인공 한생(韓生)이 용왕의 초대를 받고 용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한 작품이다. 「취유부벽정기」는 송경(松京)에 사는 홍생(洪生)이 취하여 수천 년 전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선녀가 된 기씨녀(箕氏女)를 만나 아름다운 이루어진 정신적인 사랑과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일종의 애정소설이다. 「남염부주지」는 불교를 믿지 않던 경주에 살던 박생(朴生)이 꿈속에서 남염부주(炎浮洲)에 다녀온 후 크게 깨닫는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30대의 어느 작자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茸長寺)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이 작품의 창작 배경으로는 우선 문학사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나말려초의 문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전기(傳奇) 또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 의해 마련된 서사문학적 전통이 그것이다. 또한 창작 당대에 있었던 사회사 및 사상사의 새로운 전개가 창작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건설자들은 주자학을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채택해서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역사적 운동의 과정에서 이른바 신진사류로 불리는 일련의 소외된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시습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理)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主理論)이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론이라고 공격하면서 기(氣)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주기론(主氣論),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수립하고, 이에 입각하여 만물을 객관적 · 합리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면서 그것이 작품 창작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사상 및 도교사상 등 다른 사상과의 관련성도 무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크게 보면 유자(儒者) · 선승(禪僧) · 방외인(方外人)으로서의 김시습이 상호 이질적인 다양한 사상적 근거 위에서 나름대로의 글쓰기 방식을 개척하고 정립하는 과정에서 『금오신화』가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외래적 요인으로서 명나라 구우(瞿佑)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주1의 영향도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향설은 한때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단순한 모방작품 정도로 처리되기까지 했으나, 계속된 새로운 연구에 의하여 그러한 영향설은 크게 극복되었다. 『전등신화』의 영향이 있기 이전에 이미 우리 문학사 자체 내에 『금오신화』가 창작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요인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전등신화』와 『금오신화』 사이에 소재 및 내용상의 유사성이 있어 영향이 일단 인정되지만 유사성을 모두 영향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한편 『금오신화』는 일본 소설 「가비자(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여 한국인의 풍속 · 사상 · 감정을 표현하였다.

둘째, 소재와 주제가 특이한 관계로 결합되어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소재에 귀신 · 염왕 · 용왕 · 염부주 · 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많은데, 이러한 소재가 작품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오히려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김시습은 귀신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서 행동한다든가, 현실 밖에 별도의 세계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민간 속신을 논설을 통해 일체 부정했을 뿐 아니라, 작품구조에서도 그런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작품에서 귀신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별세계를 통해 별세계의 존재를 부정했다.

비현실적 소재를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 거기에 내포된 주인공과 세계의 대결을 더욱 날카롭게 부각시켜 문제의식을 부여했다. 이러한 방법은 고도의 창작기교의 하나인 역설법이며, 그것은 주인공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횡포와 거기에 맞서 세계를 거부하고 개조하여 세계와의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주인공의 간절한 소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금오신화』는 작자가 신비주의적 · 미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합리주의적 · 과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면서, 그의 현실주의적 사상체계와 철학적 투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셋째, 결말의 처리방식이 특이하다. 주인공들은 끝에 가서 하나같이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고전소설에서 종결부가 행복한 결말로 처리되어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주인공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운명에 대한 순종이나 패배가 아니라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표현이다. 여기에 작품의 비극적 성격과 초월의 의지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넷째, 표현형식에 있어서 유려한 문어체 문장이나 시에 의해 대상이 서정적으로 미화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구성 또한 단편소설적인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시가 대량 삽입되어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 표현에 독특한 효과를 낳고 있다. 시의 대량삽입은 서정시가 국문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전기의 문학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삽입이 소설에 있어서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서사적 성격이 강한 서정시가 있을 수 있듯이 서정적 성격이 강한 소설도 있을 수 있으니, 시의 삽입이 장르 자체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이 작품은 작자의 생애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자 김시습은 학문적 능력은 탁월하면서도 정치 · 경제적 기반은 취약한 15세기 후반의 신흥사류로서 현실과의 심각한 갈등 속에서 극히 불우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는데, 『금오신화』는 그러한 그의 생애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자서전적 성격이 농후하다.

한편, 『금오신화』는 이른 시기의 소설인 만큼 소설장르로서의 한계 또한 없지 않다. 경이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설적 요소가 남아 있다든가, 소설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작품 외적 요소, 이를테면 기자조선의 멸망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나, 용궁 · 염부주 같은 특정한 민속적 사실이 생경하게 개입되어 있다든가, 서정시의 과다한 삽입과 갈등의 미약성이라든가 하는 것은 초기소설이 지닌 장르적 불안정성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금오신화』는 내용 · 기교 · 작가의식에 있어서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소설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점과 후대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매월당집(梅月堂集)』
『금오신화(金鰲新話)』(이가원 역주, 통문관, 1959)
『매월당 김시습 연구(梅月堂金時習硏究)』(정주동, 신아사, 1965)
『한국소설의 이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7)
『조선시대의 애정소설』(박일용, 집문당, 1993)
『한국전기소설의 미학』(박희병, 돌베개, 1997)
「금오신화 해제」(최남선, 『계명』 19, 19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金鰲新話

김시습 조선 시대에 지은 전기소설이자,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집. 소설이란 장르로 치자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소설이다.[1][2]

한글 이름만 보고 착각할 수 있지만, 그 신화와는 한자와 의미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신화는 귀신 신(神)자, 여기 이 금오신화는 새로울 신(新) 자.

novel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새로운 이야기, 참신한 이야기" 라는 것을 고려하면 소설이라는 조어보다도 더 정확하게 소설이라는 장르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소설집 제목이란 점을 고려할 때 흥미로운 부분.

현재는 5가지 작품만 전해지고 있다.

 

금오(金鰲)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을 뜻하는데, 경주 남산의 한 봉우리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김시습이 금오산에 있는 용장사에 7년 간 은거하며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 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라고 한다. 용장사는 조선 전기 이 때까지만 해도 절이 있었지만 21세기 현재는 터만 남았는데, 용장사지 석탑이나 석조여래좌상 등 보물이 다수 있다.

김시습 역시 조선시대 인물들이 그렇듯 본래는 유학자 출신이지만 세조의 집권 이후 세상을 버리고 출가해 산에서 도를 닦았기 때문에, 해당 소설들에는 유교와 거리가 먼 불교  도교적 사상관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귀신이 매우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귀신과 맺어지기도 한다.(...)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박생(朴生), 이생(李生) 이런 식인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당시 유생들을 생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박군, 이양과 비슷한 것이다.

이야기 구조들이 굉장히 비슷비슷하다. 조선의 매너리즘 주인공 남성이 우연히 기이한 존재와 접하거나 이계에 가게 되고, 마지막엔 종적이 묘연하거나 세상을 떠난 뒤 이계의 높으신 분이 되는 이야기. 현대식으로 따지면 행방불명 또는 돌연사... 어찌 보면 귀신에 홀려서 죽는 이야기들로 봐도 무방한 듯? 매회 중간중간엔 삽입시가 있는데 등장인물들의 심경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이런 구조는 한국 전통에서 역사의 신화화 과정과 흡사한 구조다. 한국 전통에서 역사상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신격화되고 신격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마의태자, 최영, 남이, 사도세자 등이 그런 케이스. 김시습도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시대 한계에 절망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금오신화의 구조는 신화화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금오신화 이야기가 5개 이야기 중 2개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나머지 2개는 세상을 등지고 승천했다는 이야기고 나머지 하나는 1개는 행방불명이 된다는 거였다. 처음 접한 사람들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충격적인 결말이다.

 

금오신화는 명나라의 구우가 쓴 전등신화를 참고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금오신화가 베낀 작품으로 저평가를 받을 까닭은 없다. 한국, 베트남, 일본 모두 전등신화에 기반한 번안/번역 작들이 모두 있다. 당대 아시아 최강 군사강국이었던 명나라가 아시아 전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으며, 전등신화가 당대 명나라에서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심지어 이시백의 건의로 금서로 지정되어 다 불태워 버려서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이유는 괴력난신을 다루지 말라는 현실주의적인 유가의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시백의 말을 인용하자면 학문을 갈고 닦아야 될 아시아 주변국들의 유생들이 다들 전등신화를 외우고 다니고 맨날 그 얘기만 해대면서 공부도 안 하며, 심지어 서민들이나 유생들 중 일부는 '나도 아름다운 귀신이랑 대화할 거야!' 라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도사가 되는 놈들도 있으니 사회문제가 심각하다고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영호 저 아사이 료이 문학의 성립과 성격 中) 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보니 아시아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전등신화의 한 구절을 인용한 문구까지 있다.(정유년 5월 21일자 일기) 성웅께서도 괴담을 좋아하셨다

애초에 출간된 시기 자체가 금오신화보다 먼저였던 데다가 플롯도 꽤 비슷한 데다 김시습이 전등신화를 읽고, 요즘으로 치면 전등신화 독후감상문 정도로 볼 수 있는 '제전등신화후'를 적기도 했다는 점을 보면 거의 확실하다. 이 외에도 베트남의 전기만록(傳奇漫錄)이나 일본의 오토기보코(伽婢子) 모두 전등신화를 번안한 소설들이 있다. 전기만록과 오토기보코는 현재 남아 있는 전등 신화와 1:1 대응되는 작품들이 대개이기 때문에 전등신화의 모란등기라는 작품이 보탄토로[3]로 대응되는 것을 보아 분명하다.

학계에서는 이런 것이 국가 간의 문화, 문학 전파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삼국이 모두 전등신화와 금오신화, 오토기보코, 전기만록을 서로 비교하며 전등 신화와의 견련성을 연구한다. 문제는 삼국이 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국수주의에 입각하여 '비교해 보니 내 나라 작품이 제일 우수하더라'라고 결론하는 것이 문제이다. 막상 중국에서는 전등신화 자체가 금서로 지정되어 소실된 부분이 많고, 서유기, 수호지, 삼국지연의 같은 유명한 서민 문학들이 존재하기에 막상 전등신화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한국식으로 해석하자면 전기만록의 경우 전등신화와 각 편이 1:1 대응되는 식으로 거의 모방하고 작가의 생각 하나를 추가한 수준이고, 오토기보코의 경우는 전등신화의 각 편, 금오신화 중 2편[4]를 1대 1 대응시켜서 센코쿠 시대 판으로 번안한 정도라 전등신화를 모방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금오신화의 경우는 전등신화의 소설들을 여러 개 섞은 식이라 이야기가 조금씩은 차이가 난다.

특히 애정담의 경우는 금오신화가 조금 더 비극적이라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저 두 작품이 번안이라면 금오신화는 오마주 내지 패러디 정도. 그 외에도 현재 내려오는 금오신화의 내용은 전등신화와는 다르게 악한 귀신이나 요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5]

반면 일본 측의 해석으로는 오토기보코의 문학성이 제일 우수하며[6] 또한 원문에 없는 와카 등을 추가하여 눈빛 한번에 반하던 원문에 비해서 문학성을 배가하였고, 또한 고증이 상당히 철저(?)해서 전등신화에 애경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내용이 한 유부녀가 전쟁 중 절개를 잃게 되자 자살하고서 유령이 되어 남편에게 돌아가 3년 동안 봉사하다가 3년의 시간이 되자 "저는 이미 죽은 몸이고 이제 3년의 시간이 다했으니[7] 이만 돌아가야 한다"는 여인의 절개를 비극이 있는데 이걸 기생 미야기노[8]로 번안한 오토기보코에서는 다케다 신겐 스루가 침공을 모티브로 삼았고 죽은 미야기노와 함께 3년을 도망다니다가 성불하고서 3년 후에 스루가로 돌아가는데 신겐의 스루가 침공+정리가 3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또한 서민들에게 읽기 쉽게 만들어져 이후 오토기보코를 원류로 한 수 많은 괴담 소설들이 등장했다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베트남의 작품의 경우, 명의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창작 시기가 명나라에 공격당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작가부터가 명에 매우 비판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주인공이 열심히 여주를 찾아가더니 갑자기 장르가 바뀌어서 군담물이 될 정도. 전등신화의 취취전과 금오신화의 이생규장전, 베트남의 여랑전이 서로 대응되는 작품인데, 이생규장전과 취취전에서는 남주가 여주를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모두 죽고 귀신으로서 다시 함께하게 되는 연애소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랑전의 경우는 명의 침략에 휘말려 여주가 사라지고 남주가 찾아가는 부분까지는 같으나 이미 귀신이 된 여주가 남주를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죽은 두 여성과 남기를 원해 하룻밤도 같이 하지 못하고 영원히 헤어지게 되며, 이후 남주는 영원히 결혼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 뒤 베트남의 장군으로 명에 맞서 온갖 뛰어난 업적을 이룩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더라.. 하고 끝난다. 이 외에도 뒤에 작가의 논평이 달려 있다거나(불쌍하긴 한데,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아 가문을 끊어놓았으니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겠다..는 식의 러브스토리고 뭐고 다 깨부숴놓는 논평이다) 앞의 세 나라 작품과 달리 주인공들이 평민이라는 점 등이 차이점. 더 자세한 내용은 너무 복잡해지므로 관련 전문 서적이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5편뿐이지만 창작 당시에는 다른 소설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책이 발견되었을 때 하권 끝에는 이 책을 ‘갑집(甲集)’이라고 한 기록이 있어, 본래의 작품 수는 5편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의 각주에 적혀진 전등신화와 연관해 보는 사람들도 있다.[9] 특히 전등신화의 경우 전체 4권이고 1권당 5편으로 구성+부록 1권으로 21편인 것을 보면 여러 권 중에서 1권만 보존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999년 중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는 책 자체는 단편적인 문헌으로만 존재해 책이나 소설의 행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최초로 이 책의 목판본이 발견된 곳을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일본에 있던 이 목판본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 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문화재 약탈과 관련된 거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애초에 이 목판본이 간행된 시기는 1884년 동경에서 간행된 것인 데다,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에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재간한 것이며, 초간의 대본은 오쓰카 히코타로(大塚彦太郎)의 가문에 오랫동안 전하여 오던 자료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문화재 약탈과는 거리가 멀다. 책의 조상뻘 되는 책인 전등신화 목판본이 최초로 발견된 곳 역시 일본이었다. 이쪽의 경우는 명나라 국자감에서 국민들 정서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책 자체의 간행을 금지해 버렸기 때문에...(...)하지만 이래놓고 최초로 발간된 금오신화 목판본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게 함정 대신 이 전등신화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 - 조선, 베트남, 일본 등 - 에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조선 초부터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사람들이 읽었다는 말이 있고, 일본 쪽에서도 중국에 없던 자료가 남아있었던 것이 발견된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황을 앞의 내용들과 연관지어서 문화의 전파 과정을 연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나무위키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는 '기록할 기'라는 한자로, '기록(記錄)하다', '기억(記憶)하다' 등을 뜻한다. 2. 상세[편집] · 한자문화권의 언어별 발음.

만복사에서 저포 놀이를 한 기록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만복사에서 홀로 살고 있던 양생은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것을 서러워 하던 중, 부처님과 저포놀이[2]를 해 이기고 제 짝을 찾아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부처님이 양생의 소원을 들어주었는지(?) 전쟁 중 살해당해 외딴 곳에 묻힌 처녀귀신과 양생을 만나게 해 주고, 둘이 맺어지게 된다. 이 여인의 공양을 위해 찾아온 장인 장모와도 조우했으나, 여인을 볼 수 있는건 양생 뿐. 함께 잠깐 신혼을 즐겼으나 여인은 결국 다른 곳에서 남자로 환생하게 되었다며 사라진다. 양생은 여인을 그리워 하다가 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뒤 그의 소식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덧붙여 작중 묘사라는 양생의 아내의 나이가 15~16세 정도로 묘사되지만 당시에는 중고등학생 나이 정도되면 결혼하는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유난하다고 할만한 연령은 아니다.

여담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의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처나 보살 등에게 인연을 기원하는 사람이 결국 사랑 같은 속세의 행복은 덧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후 김만중 구운몽에서도 그렇고....

사실 이 소설의 가장 슬픈 점이라 하면, 양생이 죽어 저승에서 여인을 만나려 해도, 여인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양생은 어떻게 해도 여인을 만날수 없다는 것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소설 마지막 문구를 보면 알듯이 양생과 여인의 최종목표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탈이며, 남자로 환생하는것 역시 해탈을 위한 빌드업이다.(당시 불교에는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성차별이 만연했다. 그래서 일단 남자로 환생 후 공덕을 쌓는 것이다.) 금오신화가 그렇듯 한시 문구에서 도교적 느낌도 느껴진다. 그러니 극락이나 무릉도원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해보자. 아니면 BL엔딩이 되던가

소설의 배경인 만복사 실제 전라북도 남원시에 존재했던 사찰이다. 신정동 남원역과 남원 시내 사이에 있다. 지금은 절은 사라지고 터만 보존되어 있다. 남원시 왕정동에 만복사지가 있는데, 만복사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만복사지 5층석탑.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건설된 탑으로 고려 초기의 탑이라 보물 30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전승으로는 도선대사가 창립한 절이라고 하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문종 때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5층석탑도 이 시기의 유적이라 절 자체가 이시기에 세워졌고 절의 권위를 높이려고 도선대사 창립설이 퍼진 듯하다. 1597년에 발발한 정유재란  칠천량에서 원균의 해군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했고, 일본군은 남원성을 점령한 후 만복사를 불태워 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인 숙종 때 만복사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절이 너무 커서 포기하고 그냥 승방 한 채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결국 만복사는 재건되지 못한 채 지금도 절터로 남아 있다.

이야기 소재 자체는 수신기에 실린 부마 신도탁 이야기와 흡사하다. 자세한 내용은 부마 항목 참고.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 영역에 2번째 지문(16~19번)으로 출제되었다.-나무위키


취유부벽정기

상인인 홍생은 술을 마시고 평양 부벽루에 올라갔다가, 한 여인과 만나 서로 시를 주고 받는다. 여인은 홍생에게 하늘의 술과 육포 등을 내어 대접하며, 자신을 기자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의 딸이라고 소개하며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자살하려다가 단군[11]의 도움으로 천녀가 되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을 느끼다가 기랑은 다시금 천계로 올라가 버린다. 홍생은 기랑을 그리워 하던 중 자신이 상제의 명으로 선관이 되었다는 꿈을 꾸고 이를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죽고 나서도 시체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말끔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선인이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남염부주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집에서 잉여로 지내던(…) 박생은 어느 날 저승사자의 인도로 염부주에 가게 된다. 그곳은 염마왕이 다스리고 있는 저승으로, 염마왕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고 있었다. 박생은 염마왕과 토론을 벌이고 그에게서 인정받는다. 염마왕은 박생을 염부주의 새로운 왕으로 지목한다.

이승으로 돌아온 박생은 집안일을 정리하고 어느 날 세상을 떠나는데, 이웃 사람들의 꿈에 저승사자가 나타나 그가 염부주의 염라왕이 되었음을 알린다. 박생과 염마왕의 토론 부분은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데 김시습의 방외인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용궁부연록

글솜씨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한생이 용궁에 초대를 받아 가고 그곳에서 상량문을 지어 올리게 된다. 용왕은 그의 재주를 칭찬하며 연회에서 잘 대접한 후, 용궁 구경을 시켜주고 각종 진귀한 보물을 선물해 도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꿈에서 깨어난 한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 한생은 어린 시절 뛰어난 글솜씨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방외인으로 남게 된 김시습의 모습을 나타내며, 용왕은 세종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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