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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cheon, 송천 2023. 1. 2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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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레스크, humoresque
명사음악
기악곡의 형식의 한 가지.
유머가 있는 분방한 성격을 가진 곡으로 슈만·드보르자크의 작품 등이 있음. 표일곡.

유머레스크(Humoresque, 프랑스어: Humoresque 위모레스크[*], 독일어: Humoreske 후모레스케[*])는 낭만주의 음악의 갈래 가운데 하나이다.

안토닌 드보르자크: 〈8개의 유머레스크 작품번호 101〉(1894년)가 있는데, 이 가운데 7번 내림 사장조가 알려져 있다.
로베르트 슈만: 〈유머레스크 내림 나장조 작품번호 20〉(1839년)가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유머레스크 사장조 작품번호 20〉(1893년 작곡, 1940년 개정)가 있다.

가곡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이 기악곡이다.




안토닌 드보르자크
체코의 작곡가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체코어: Antonín Leopold Dvořák [ˈantoɲiːn ˈlɛopold ˈdvor̝aːk][*], 1841년 9월 8일 ~ 1904년 5월 1일)는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이다. 여러 작품을 작곡했는데, 특히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 보헤미아의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자크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에 두각을 드러냈다. 1872년 프라하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873년에는 31세의 나이로 특별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라하 이외의 지역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위해 독일에서 열린 시상식에 교향곡 제1번의 악보를 제출했지만, 우승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분실되었다가 수십년 뒤에서야 발견되었다. 1874년에는 오스트리아 작곡상에 두 개의 교향곡과 다른 작품들의 악보를 제출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드보르자크의 곡에 큰 감명을 받았다. 드보르자크는 1874년과 1876년에 브람스와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로 부터 오스트리아 작곡상을 수상했다. 브람스는 드보르자크를 자신의 전속 출판사 N. 짐로크에게 추천했고, N. 짐로크는 드보르자크에게 슬라브 무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슬라브 무곡은 1878년 베를린 음악 평론가 루이 엘레르트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피아노 4핸드 버전의 악보가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드보르자크의 명성이 전세계에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드보르자크의 첫 번째 종교 작품인 스타바트 마테르는 1880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883년 런던 공연도 매우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뒤따라 영국과 미국에서 여러 공연을 열었다. 드보르자크는 영국을 9번이나 방문했는데,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의 7번 교향곡은 런던에 헌정되었다. 1890년 3월 러시아를 방문한 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을 직접 지휘했다. 1891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892년 드보르자크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있는 미국 국립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미국 국립 음악원의 총장인 자넷 서버(Jeannette Thurber)는 드보르자크에게 연봉 15,000달러(2020년 기준 43만달러)를 제안했는데, 이는 그가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고 있던 연봉의 2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드보르자크는 8번 교향곡과 9번 교향곡을 써 전세계에 그 명성을 널리 알렸다. 첼로 협주곡도 이 때 작곡한 것이다.

1893년 여름, 드보르자크는 비서 J.J. 코바릭의 조언에 따라 뉴욕에서 아이오와주 스필빌로 이사했다. 드보르자크는 원래 보헤미아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스필빌은 대부분 체코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치 보헤미아에 있는 듯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드보르자크는 여기를 두고 "여름의 비소카"라고 부르기도 했다. 드보르자크는 여기서 현악 사중주 12번을 썼는데, 후에 "미국"이라는 별칭이 붙은 작품이다. 아이오와에서 휴가를 끝마친 드보르자크는 미국 국립 음악원에서 계약을 2년 연장한다. 그러나 1893년 4월의 경제 위기로 인해 음악원 총장이던 자넷 서버의 남편이 수입이 줄어들자, 국립 음악원의 재정도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드보르자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향수병과 임금 감소를 겪던 드보르자크는 1895년 미국을 떠나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9편은 그의 첫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리브레토가 체코어로 되어있다. 이 작품들은 드보르자크의 합창곡들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민족의 얼을 표현하고 있다. 드보르자크의 오페라중에는 《루살카》가 가장 유명하다. 소품들 중에는 《유머레스크》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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