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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서군, 동군, Exhuma, 破墓, 파묘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 전투
#西軍
#서군
#東軍
#동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군(西軍) vs. 동군(東軍)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死後), 일본의 지배권 갈등
동군의 승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수립, 조선 및 명나라 외교관계 개선 시도
1600년(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초[16])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를 가른 중요한 전투들 중 하나로,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뭉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에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이다. 이 전투의 승자에게는 향후 265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력이, 패자에게는 죽음과 가문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규모면에서는 양군 통틀어 17만이라는 대군이 맞붙었고[17] 역사적으로도 일본사의 큰 흐름을 결정짓게 되는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단 3시간에 불과했다. (한편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를 넓은 의미로 보아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을 총칭하는 것으로 하면 세키가하라 전쟁은 도호쿠,[18] 호쿠리쿠,[19] 규슈[20]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투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조선에게 사과서신을 보내며 유화책을 펼쳐 조선과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는 데다가 서군을 지지한 다수의 다이묘들이 가이에키당하여 멸문지화(가문자체가 망하는 일)되거나 전봉되는 등의 파급효과가 일어났으므로 정치적인 의의도 크다.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이 곳이 우리의 세키가하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시기적으로는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인해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전한 지 2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공격했던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도 타카토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 일본군 장수들이 다수 참전했다.[21] 고니시(小西)와 가토(加藤)는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22]-나무위키
세키가하라 전투(일본어: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 노 타타카이[*])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서기 1600년 10월 21일)에 미노국 후와군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정)를 주전장으로 하여 행해진 야전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져 세키가하라의 전투라고도 불린다. 전투 당시는 난보쿠초 시대의 옛 전장(古戰場), '아오노하라'(青野原)나 '아오노가하라'(青野カ原)라고 쓰여진 문헌도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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